2008년 2월 13일은 호주 역사에 이정표로 남을 날이다.
이 날 호주 정부는 과거 1970년대까지 한 세기 동안 원주민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주민 자녀들을 강제로 백인 가정이나 선교사, 고아원이 기르도록 했던 10만 명에 이르는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에 사과하였고 같은 날 의회는 동일한 내용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호주가 연방정부 차원에서 원주민들에게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미주 대륙과 마찬가지로 유럽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이 살던 땅을 정복하여 세워진 호주에서 백인 이주사는 곧 원주민 수난사였다.
가장 악명높은 사례는 오늘날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관광지 태즈매니아(Tasmania) 섬에서 벌어졌다. 1803년 첫 백인 정착촌이 세워진 이 섬의 원주민들은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백인들의 질병과 학살로 씨를 말려버렸다(많은 이들은 이를 제노사이드라 부른다).
다른 호주 원주민들 역시 백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겨났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사람 대접 받을 자격이 없는 "미개인"으로 간주하며 수많은 만행을 자행했다.
원주민 아동의 백인 가정에의 강제 입양 정책 역시 이러한 인종주의, "문명화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부모와 생이별한 아이들은 백인 "양부모"로보터 신체적, 성적 학대를 받으며 평생 갈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비슷한 일이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지에서도 벌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수십 년간 묻혀 있다가 1980년대에 들어 소설, 영화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995년 당시 노동당 정부는 우리나라의 국가인권위원회에 해당하는 인권 및 평등기회 위원회(Human Rights and Equal Opportunity Commission)에 공식조사를 요청하였고 위원회는 1997년 의회에 조사를 종합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Bringing Them Home - Report of the National Inquiry into the Separation of Aboriginal and Torres Strait Islander Children from Their Families.
http://www.humanrights.gov.au/social_justice/bth_report/index.html
보고서는 호주 의회가 원주민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유엔에서 제시한 인권침해 피해자 배상 기준(van Boven Principles)에 따라 배상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호주 인권위원회가 조사를 진행하던 중이던 1996년 정권이 자유당으로 교체되었는데 이후 11년간 집권한 보수성향인 하워드 총리는 옛 과오에 대해 현세대의 호주인들이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다며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1999년 유감을 표하는 결의안을 내는 데 그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의회들은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97년 뉴사우스웨일즈 및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를 시작으로 사과 결의안을 채택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는 자유당이 집권하고 있는 주정부도 있었다.
한편 피해자들 역시 연방 법원 및 주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하였고 작년 8월에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대법원은 주정부에 525만 불의 배상을 명령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TREVORROW v STATE OF SOUTH AUSTRALIA (No 5) [2007] SASC 285 (1 August 2007)
http://austlii.law.uts.edu.au/au/cases/sa/SASC/2007/285.html
Stolen generation payout
http://www.theage.com.au/news/national/stolen-generation-payout/2007/08/01/1185647978562.html
2001년 연방법원에서 제기된 소송에서는 재판부가 청구를 기각하면서도 이는 당사건의 증거 부족에 인한 것으로 다른 사건에서는 배상청구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밝혔다.
Cubillo v Commonwealth of Australia (includes summary) [2001] FCA 1213 (31 August 2001)
http://www.austlii.edu.au/au/cases/cth/federal_ct/2001/1213.html
국제적으로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기간 중 호주 정부는 이 문제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으며 유엔 역시 호주 정부의 전향적 태도를 요구하였다.
한편 작년 11월 총선에서 압승한 노동당은 공식사과를 공약으로 내세워 왔다.
그리고 케빈 러드 총리는 2월 13일 연방의회에서 사과 결의를 제출하고 그 당위성을 설명하는 연설을 하였다.
Australia Says Sorry to Stolen Generation 2008
http://youtube.com/watch?v=wuSDiw4IvPs
Australia Says Sorry to Stolen Generation 2008- Part 2
http://youtube.com/watch?v=SzodDAaPdJw
Australia Says Sorry to Stolen Generation 2008- Part 3
http://youtube.com/watch?v=ZzXTTM5FAU0
연설문 전문:
http://www.aph.gov.au/house/Rudd_Speech.pdf
연설 하이라이트:
Kevin Rudd apologises to the Aboriginal Stolen Generation
http://youtube.com/watch?v=uERSO_9M75k
연설을 보고 있자면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를 하는 데 있어서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러드 총리는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 출신인데, 하워드 총리가 이끄는 우파 자유당 정권을 11년만에 종식시킨 노동당 당수에 걸맞는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사과 결의안을 집권 이후 처음으로 개원한 의회의 첫 회기의 첫 의안으로 제출하여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결의안 제출 및 연설을 하기에 앞서 원주민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어떠한 내용을 포함시킬지 상담을 한 러드 총리는 우선 왜 사과가 필요한지에 대해 일반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Nanna Nungala Fejo shared sorrow and joy with PM
http://www.smh.com.au/news/national/nanna-nungala-fejo-shared-sorrow-and-joy-with-pm/2008/02/13/1202760398977.html
우선 나나 페조(Nanna Fejo)라는 한 원주민 여성의 경험담을 얘기하면서 그녀가 상식적으로 얼마나 부당한 처우를 받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역사책에서나 나올 옛날 얘기로 치부될 수 있는 사안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러드 총리는 또한 사과 반대 의견을 반박하는 논리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이 사안을 역사가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피해자들은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intellectual curiosities)이 아니라 정부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인간(human beings)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거 일에 대해 현세대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 일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관련 법을 제정한 의회에 책임이 있으며, 선조가 누린 축복을 물려받은 자손으로서 그들의 짐도 물려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래도 사과의 필요성에 납득하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만약 자기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으면 어땠을 지를 상상해보라는 말을 남긴다.
피해자들을 향해서도 책임 및 사과의 주체가 호주 총리, 정부, 의회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 날의 사과가 피해자들의 아픔을 없앨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연설은 피해자들에게 정중히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이같은 일이 절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호주 정부의 사과는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우선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의 대조일 것이다. 실제 이는 국내 한 신문의 사설에도 나오고 있다.
호주 정부가 시인하고 사과한 원주민 탄압 만행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21401033137043002
일본 정부가 수 차례에 걸쳐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사과"를 해왔지만 피해자나 피해국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진솔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도 일본인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참고할 점이 있는 것 같다.
먼저, 피해자 개인의 사례를 들면서 인간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다. 러드 총리가 사과 연설에서 나나 페조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부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도 군대성노예,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적인 사연을 들어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인들에게 자기 자신이나 자기 부모, 자식, 동생에게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어떠한 심정일지를 생각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다 과거의 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아직 가해자, 피해자가 살아있고, 일본 정부의 공식 정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강제노동의 경우 당시 수혜를 입은 일본 정부 및 기업들이 이제 와서 과거의 책임에 눈감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호주 정부의 공식 사과가 있기까지는 원주민 단체, 인권운동가, 국제사회의 운동이 있었다. 특히 소설, 영화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진상이 알려진 것은 여론을 돌리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백인기관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아 긴 여정을 걸었던 원주민 아이의 실화를 다룬 책 Follow the Rabbit-Proof Fence (1996년)과 이를 영화화한 Rabbit-Proof Fence (2002년)를 꼽을 수 있다.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알리는 데도 쉰들러 리스트 등이 중요했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군대성노예, 731부대 생체실험 등의 역사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예술 작품들이 더 나와야 한다.
그러나 호주의 사례로부터 정말 배워야 할 데는 바로 일본이다.
먼저 사과를 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 한다.
조건을 달지 말아라. 아베가 그랬듯이 "협의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식의 궤변은 사과의 효과를 증발시킨다(애를 낚아채서 유괴하면 강제성이 있는 것이고 사탕 주겠다며 꼬셔서 유괴하면 강제성이 없다는 건가? 이런 소리를 하니 국제사회의 냉소를 받는 것이다).
러드 총리에 이어 나온 야당 지도자인 자유당의 당수 브렌든 넬슨의 연설은 역시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를 구했음에도 대부분의 사례들이 "선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펴서 피해자들의 비난을 받았다(사실 넬슨 당수는 애초부터 사과 결의안에 반대하다가 당내에서조차 거센 반발이 일자 막판에 입장을 바꿨다).
넬슨 연설:
http://www.aph.gov.au/house/Nelson_speech.pdf
"Our responsibility, every one of us, is to understand what happened here, why it happened and the impact it had on not only those who were removed but also those who did the removing and supported it. Our generation does not own these actions, nor should it feel guilt for what was done in many, but certainly not all, cases with the best of intentions. But in saying we are sorry, and deeply so, we remind ourselves that each generation lives in ignorance of the long-term consequences of its decisions and actions. Even when motivated by inherent humanity and decency to reach out to the dispossessed in extreme adversity, our actions can have unintended outcomes. As such, many decent Australians are hurt by accusations of theft in relation to their good intentions. (강조 첨가)"
사실 이 문제는 "도둑맞은 세대"와 관련한 핵심쟁점이다. 원주민 아동의 백인 가정이나 시설 편입은 원주민 아동이 고아이거나 원주민 부모가 양육을 포기하였을 경우에도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결정은 당국에 의해 임의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자 수를 추산하기는 힘들다.
이를 근거로 몇몇 보수적 인사들은 실제로 원주민 부모로부터 부당하게 강탈당한 아동은 극히 일부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전임 하워드 총리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러 피해자들의 증언과 원주민들을 백인 사회에 편입시켜 씨를 말리는 것이 정책의 목표임을 밝힌 담당 관리들의 기록은 이러한 정책이 정부 차원에서 원주민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자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명확해진 것은 호주 인권 및 평등기회 위원회가 1995년부터 1997년까지의 조사를 거쳐 낸 보고서 덕분이다. 이는 권위있는 공식 전문기관에 의한 사실관계의 확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사실 일본 정부도 1990년대 초 여론이 들끓자 조사를 하긴 하고 관련자료를 공개하긴 하였다. 그러나 피해자의 증언은 반영시키지 않은 채 "객관적 사료" 즉 공식문서만을 조사대상으로 하였고 그마저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방위청 자료 중 상당부분과 경찰, 노동성, 후생성 자료를 비공개로 분류하였다(『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全5巻、龍溪書舎出版)). 조사도 추후에 계속하겠다고 해놓고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부 역시 같은 시기에 정부 대책반을 세워 조사 보고서를 내면서 조사연구를 계속하겠다고 해놓고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
일본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역사문제 등에 있어서 중앙정부보다도 더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1995년 당시 사회당의 무라야마 총리가 전쟁사죄 결의안을 채택하려 하자, 보수우익 세력들은 26개 현의회(일본의 43현 중 60% 초과), 90개 시촌 의회에서 전몰자 추도감사 결의를 채택하였다(아시아 여성기금이라는 최악수르 둔 사회당은 여기서도 손 놓고 당하였다).
호주의 각주 정부들이 연방정부에 앞서 사과를 하고 피해자 배상에 나서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이게 일본의 암울한 현실이다).
한편, 러드 총리의 연설을 일관하는 논지는 결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과를 함으로써 호주가 덜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호주 의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사과 결의의 다음 문장은 이를 잘 나타낸다.
"The time has now come for the nation to turn a new page in Australia’s history by righting the wrongs of the past and so moving forward with confidence to the future. ... For the future we take heart; resolving that this new page in the history of our great continent can now be written."
물론 러드 총리도 지적하였듯이 공식 사과는 원주민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러드 총리는 이 날 연설에서 구체적으로 일반인들과의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도입할 것을 약속하였다. 반면 러드 총리는 원주민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배상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보수 진영에서 사과에 반대한 것도 뒤이어 나올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 때문이었다).
위에서 봤듯이 호주 법원은 이미 피해자 배상 판결을 내린 바 있으며, 이번 공식 사과를 계기로 피해자들의 배상청구 소송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송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높은 피해 입증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가 구제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피해자 배상기금 마련이 주장되고 있으며, 태즈매니아 주는 실제로 이를 이행하고 있다.
Tasmania to compensate Aboriginal 'stolen generation'
http://www.guardian.co.uk/world/2008/jan/22/australia.barbaramcmahon
일본의 경우, 보수적인 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배상을 위한 기금 설립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물론 아시아 여성기금과 같이 사업주체를 모호하게 하는 정부 책임회피용 배상기금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슷한 배상 제도가 캐나다의 원주민 피해자를 대상으로도 진행되고 있다.
Indian Residential Schools Resolution Canada
http://www.irsr-rqpi.gc.ca/english/index.html
앞으로 호주 정부가 어떠한 피해자 구제책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사진 1: Nanna Fejo 사진(위 Sydney Morning Herald 기사).
사진 2: Bruce Trevorrow 사진(위 The Age 기사).